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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구곡로- 의리적 풀이

청정주 2010. 3. 29. 07:54

<대적공실 해의> 언어도단의 입정처 유무초월의 생사문

대적공실 4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邊山九曲路 石立聽水聲)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無無亦無無 非非亦非非)

변산의 굽이치는 계곡에서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고 또한 없음마저도 없으며,

아니요 아니요 또한 아님마저도 아니다

 

5-2. 의리적 풀이

 1. 언어도단의 입정처(言語道斷의 入定處)

 

① 부처님은 꽃, 대종사님은 돌

‘변산구곡로에 석립청수성’이라 ‘변산의 굽이치는 계곡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는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돌(石)을 역설이나 말로서 강연히 표현할 수 없는 자리(言語道斷의 入定處)에 대해 상징적인 단어로 사용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선사들의 시에 보면 ‘석녀(石女) 즉 돌처녀가 옆구리로 애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되나요? 처녀가 애낳는 것도 말이 안되는데 그것도 돌이, 또 그것도 옆구리로 말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표현을 하는 것은 결국 언어도단 자리를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산회상 거염화, 그리고 일원상 서원문의 언어도단과 같은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무정물인 돌(石)이 보거나 듣거나 애를 낳을 수 있나요?

부처님은 영산회상에서 법설을 하시다가 강연히 꽃을 드셨는데, 대종사님은 변산의 물 흐르는 것을 보시다가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빙긋이 미소를 지은 가섭에게 ‘너는 꽃을 든 이유를 알았으니 정법안장을 준다’고 하셨듯, 대종사님도 ‘이 뜻을 알면 도를 깨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알 것 같습니까?


② 돌(石)=대종사님=나

대종사님께서 변산에서 제법을 하실 때 봉래정사를 뭐라고 하셨습니까? ‘석두암(石頭庵)’ 그리고 스스로를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하셨습니다. 석두…이때 쓰인 석두는 돌 석(石) 머리 두(頭)해서 ‘돌머리’, 속되게 표현하면 ‘돌대가리’란 뜻입니다.

돌대가리는 어리석거나 바보같은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데, 한마디로 대종사님은 ‘나는 돌대가리’요 석두암은 ‘돌대가리가 사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어리석음을 표하려고 한 게 아니라 돌 처럼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무심하게 은둔하고 계심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떻든 또 문학적으로 이 시를 풀어보면 돌(石)은 대종사님 당신으로 비유할 수 있지요.

그러면 어때요? “내가 변산에서 굽이치는 물줄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변산이 천기를 누설하는구나”라고 옮겨 볼 수 있습니다.

천지가 뿜어내는 진리의 비기(秘記)가 성리소식으로 표현됩니다.


한마디로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은 ‘언어도단의 입정처 자리’를 강연히 표현하고 계십니다.


2. 유무초월의 생사문(有無超越의 生死門)

그러면 그 천지가 뿜어내는 비기를 한번 알아봅시다.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라 ‘없고 없고 그 없음마저도 없고, 아니고 아니고 그 아님마저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니까 햇갈리십니까?


①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 유무초월

‘없단다 없단다 (뭐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없는 것 그것 마저도 없단다’는 말입니다.

없을 무(無)는 있을 유(有)에 상대되는 말이지요. 우리가 항상 눈에 보이는 것, 있는 것 즉 유에만 집착하니까 ‘없단다 없단다’ 하신 것입니다.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앞의 ‘무무’입니다.

그런데 또 뭐라고 했는가요? 뒤에 ‘없는 것 그것도 없단다’ 하셨습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말인데 결국 유무초월을 말하는 거지요. ‘없고 없고 그 없음마저도 없다(無無亦無無)’는 유무를 초월한 생사문을 뜻합니다.


②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 - 언어도단

비비역비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란다 아니란다 (뭐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닌 것 그것마저도 아니란다’는 말입니다.

아닐 비(非)는 옳은 시(是)에 상대되는 상징어입니다. 우리가 뭣 좀 알다보니까 주견이 생겨서 ‘야 그건 아니야, 이게 옳아’, 또 전쟁을 할 때도 ‘이게 옳아’, 떠 물건을 만들어 환경을 파괴하더라도 일단은 ‘이게 옳아’, 뭐든지 당장 옳다고 하니까 ‘아니란다 아니란다’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간이 ‘이것이 옳다’ 하고 주장하고 만든 모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니라고 하는 이것도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아니고 아니고 그 아님마저도 아니다(非非亦非非)’는 시비마저 벗어난 자리를 뜻합니다. 시비의 구분은 말과 글로부터 비롯됩니다. 시비초월 즉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자 유무초월의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는 ‘유무초월의 생사문’이자 ‘언어도단의 입정처’ 자리를 말하고 계십니다.


③ 무(無)와 비(非)를 나눈 뜻

그런데 무든 비든 하나만 해도 유무초월을 말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무와 비 두가지를 다 가지고 왔을까요?


‘유무’는 뭡니까?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즉 ‘변화’를 말합니다. 따라서 ‘무무역무무’는 유무초월의 생사문이긴 한데 특히 ‘우주만물의 순환무궁한 진리’를 강조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리(性理)에서 보면 ‘리(理)’자리를 말합니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강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비’는 뭐지요? 이해(利害)를 덧붙여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롭다’ 즉 시비이해는 ‘인간의 일’입니다. 따라서 ‘비비역비비’는 인간의 시비이해 그걸 벗어난 ‘청정한 인간의 본래 성품’을 더 강조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리(性理)에서 보면 ‘성(性)’자리입니다.

시비이해의 일을 강조것입니다.


자 일원상 진리에서 확인했지요. 우주자연의 운행 원리와 인간 성품의 원리는 같은 것, 일원상 진리는 우주와 인생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구요. 이처럼 무와 비를 나눈 뜻은 같은 ‘유무초월의 생사문’을 뜻하지만 ‘우주의 순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 ‘무(無)’를 썼고,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非)’를 썼습니다.


따라서 의리적으로 본다면 “가만히 변산의 굽이치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유무초월이요, 시비마저 벗어났구나”하며 성리 소식, 즉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깨침을 직설적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이구나”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