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생교단 가운데 원불교는 대표적인 위치에 있다. 원불교가 창교 83년만에 기성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일반 교도의 건전한 신앙생활이 바탕이 됐다. 그러나 종교의 속성상 성직자들의 지도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의 뒤를 정산 송규, 대산 김대거, 좌산 이광정 등의 종법사들이 이으며 원불교는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 원불교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창교자인 소태산이 준비한 프로그램대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소태산은 원불교를 창립(1916)한 바로 이듬해 1회를 12년, 1대를 36년으로 하는 창립한도를 선포한다. 교단운영을 장단기 기획에 의하겠다 뜻이었다. 후일 그는 교화·교육·자선(사회복지)이라는 3대 사업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원칙은 오늘날 원불교 교단운영의 기획지표가 되고 있다. 소태산의 시간구분에 의하면 1대는 소태산의 재세기간인 일제시대이며 주로 교단체제의 기초를 닦는 기간이었다. 제2대는 정산 송규(鼎山 宋奎·1900~1962)와 대산 김대거(大山金大擧·1914~)가 종법사(宗法師)에 재위한 기간으로, 이들에 의해 오늘날의 교단모습이 갖추어진 셈이다. 그리고 지금 좌산 이광정(左山 李廣淨) 종법사의 재위와 더불어 제3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를 창립한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1891∼1943)을 원불교에서는 대종사라고 부른다. 대종사는 따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혼자서 구도 수행해, 1916년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를 원불교의 창립 원년(圓紀元年)으로 삼아 현재 개교 83년에 이르렀다.
소태산이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시기는 안으로 왕권수호를 표방한 보수세력과 봉건적 차별주의를 혁파하여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진보세력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강대국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격동기를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소태산은 이처럼 우리나라가 겪었던 고난과 혼란의 역사를 새로운 문명으로 넘어가는 세계사의 전환기적 과도기 현상으로 보는 한편, 우리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내다보지 못하여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이라고 보았다. 소태산이 말하는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새 문명세계를 맞이하여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능력을 말한다.
소태산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새 세상을 이끌어갈 실력을 갖추는 일에 착수했다.
암흑의 시대에 종교 창시한 소태산
그러나 그는 과거 종교 창립자들이 했던 방식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맨처음 제자들과 더불어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근검과 저축의 생활화를 가르쳤다. 소태산이 조직한 저축조합은 단순한 경제적 목적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개혁을 가르치는 정신교육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교육으로 의식이 깨어나면 세상이 바로 보이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찾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소태산은 계몽주의자요 도덕운동가이며 사회개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저축조합의 회원들은 모두가 소태산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다. 소태산은 그 제자들과 함께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드는 간척사업을 일으켰다. 당시에 산골 형편으로는 엄청나다고 할 만한 2만5천여평의 농토를 일구어 낸 것이다. 이 사업은 외형상으로 볼 때 결코 종교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가 영적인 구원에만 매달려서 현실생활을 도외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왔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육신의 삶과 정신적인 삶이 둘 다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교훈을 주고 있다. 또한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믿음을 돈독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어 신앙공동체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소태산이 종교의 간판을 처음 내건 때는 1924년이었다. 당시 그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지금의 원불교 중앙총부가 자리하고 있는 전라북도 익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원불교의 문을 열었다. 이 이름은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불교의 경전을 보고 교리의 심오
광대함에 놀라워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찬탄하고 2천5백년의 시차를 넘어 부처님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한 점, 그리고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은신처가 되기 쉬운 종교들, 특히 신종교 단체에 대해 감시와 탄압이 극심하였기에 전통종교인 불교를 가르치는 단체임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복합된 교명이었다.
불교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연구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불법연구회만을 감시하기 위하여 별도의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설치할 정도였다. 도산 안창호와 소태산의 만남에 관한 일화는 ‘불법연구회’의 활동상을 짐작게 한다. 당시 민족지도자로 존경받던 도산 안창호는 옥고를 치르고 나와 잠시 유람을 다니다 불법연구회에 들러 소태산을 만났다. 안창호 선생은 불법연구회의 일사불란한 조직운영과 회원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불법연구회는 나라를 맡겨도 능히 잘 다스려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또 안창호는 소태산을 향해 자기는‘독립운동을 하노라고 했지만 얻은 것도 없이 고생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는데 선생은 조용한 가운데 이처럼 큰 일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그런 소태산의 모습을 총독부에서는 조선의 간디라고 부르며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태산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일제 식민통치 말기인 43년 6월, 53세에 열반했다. 당시 총독부는 다른 신종교들의 예로 비추어볼 때 교조인 소태산의 열반으로 불법연구회는 저절로 궤멸할 것으로 보아 감시를 늦췄다. 그러나 불법연구회는 바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선거를 실시, 정산 송규(鼎山宋奎·1900∼1962)를 최고지도자인 종법사로 추대했다.
송규는 43년 종법사위에 올라, 해방 전후부터 6·25동란을 거치는 동안 원불교 교단을 이끌면서, 소태산의 사상을 구세이념(救世理念)으로 체계화한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영남학파의 대종을 잇는 학구파였다. 그런만큼 소태산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해방과 함께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불법연구회’라는 임시교명을 고쳐 ‘원불교’(圓佛敎)라는 정식교명을 선포하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개설한다. 원불교는 일제시대부터 종교적인 신앙과 수행이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다. 야학을 운영하여 한글보급과 국민정신 계몽에 나섰고 인재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착실히 준비했다. 그러한 노력은 46년에 지금의 원광대학교 전신인 ‘유일학림’의 설립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유일학림은 중등부와 전문부로 나뉘어 중등부는 중·고등학교로, 전문부는 초급대학, 단과대학을 거쳐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과 사회복지시설도 이때를 기점으로 터가 잡혔다.
정산에게는 소태산의 법문수필과 교리해설에 관한 다양한 논문들이 있다. 깊은 수도를 통해 체현된 궁극적인 세계를 노래한 ‘원각가’(圓覺歌) 등의 숱한 시문들은 곡이 붙여져 오늘날 원불교의 성가로 애창되고 있기도 하다. 저술로는 삶의 도리를 밝힌 “세전”(世典), 소태산의 인간상을 집약한 “소태산대종사비명”(少太山大宗師碑銘), 건국의 강령을 밝힌 “건국론”(建國論), 원불교의 역사를 기록한 “창건사”(創建史), 그리고 언행록인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등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45년 10월에 발표한 “건국론”은 해방 직후 종교인이 제창한 국가건설의 체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외인사들이 발표한 건국강령이 아직 국내에 유입되기 전인 당시, 좌우익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중도철학을 제시한
바는 탁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건국의 3대원칙으로‘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주장했다. 이는 72년 남북이 합의한
7·4공동성명의 이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91년 남북 기본합의서의 정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요즈음 교단에서는 탄생백주년대회(2000년)를 앞두고 “건국론” 조명이 한창이다. “건국론”에 나타난 평화통일이념을 민족의 현안문제 해결의 원리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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