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세상 /밝고

대적공실(교단백주년)

청정주 2010. 7. 18. 20:52

<대적공실 종합> 진리 속에서 부처행을 하는 것

 

1)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중에서 중생제도 하기를

    마쳤다.

 

깨달은 이를 보고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부처를 '여래'라고도 하지요. 여래(如來)는 같을 여(如) 올 래(來), 한결같이 온다는 말이지요. 흔적이 없으니까 한결같지요.

하지만 중생은 흔적을 남기니까 여래가 아니라 '거래(去來)'이지요. 거래를 하지요.

부처님이 거하시는 도솔천과, 속인들이 사는 왕궁가...부처님들은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오고 가시는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주착하지 않으니 결국 천하를 소유하게 되는 셈입니다.

‘도솔천을 떠나지 않으시고 왕궁가에 내리신다’는 말은 시방일가, 즉 우주가 한 집안이라…우주의 본가를 찾는 시방일가의 소식입니다. 오고 가는데 한결같은 여래가 되어 내 집을 벗어나 천하를 소유하십시오.

 

모태(母胎)는 어머니의 태중을 말하지요.

태어나면서부터 까만 것, 하얀 것, 좋은 것, 나쁜 것 분별을 하지 태어나기 전에는 아직 분별을 안하니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따라서 모태는 분별이 없는 자리입니다.

즉 분별과 주착이라는 번뇌가 없는 그 본래 자리에서는 자타의 국한이 없지요. 부처와 중생의 구분이 없지요.

‘모태중에서 중생제도를 마쳤다’는 말은 본래 자리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구분이 없으니 누구를 건지고 말 것도 없다는 것이요, 또 모든 중생을 건지는 것이 됩니다. 사생일신이라 부처와 중생이 한 몸이라…이것이 참 나를 찾아 영생을 얻는 성불이요 사생일신의 소식입니다.

 

 

 

 

2)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찌기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두 번째 의두, 녹야원은 부처님이 35세에 성도한 후 처음 설법하신 곳이요 발제하라는 곳은 부처님이 80세에 열반하신 곳입니다.

45년간 84,000번의 설법을 하셨다는데 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어요?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지요. 다 건너면 그 배에서 내려야지요. 그 배에 타고 있으면 영원히 그 건너편에 못가지요? 그 배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84,000 무량법문은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 배와 같은 것이라 종국에는 그 법문을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언어도단의 입정처, 말과 글이 강연히 끊어진 자리라는 말이지요.

 

 <석가모니>

3)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古不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구가 생겨났나요?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요.

마찬가지로 진리라는 것이 부처님이 깨달을 때부터 생겨났나요?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있어 왔는데 부처님께서, 대종사님께서 깨달으신 거지요.

그래서 옛 부처님 나기 전에도 응연하게 한 상은 둥글었다는 말입니다. 그 전부터 일원상 부처님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름만 그렇게 붙였다는 말이지요.

 

달나라에 간 아폴로 호에서, 그리고 우주왕복선에서 지구 사진을 찍어서 우리는 지구가 푸르고 둥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지구를 볼 수 없지요. 그냥 지구와 하나가 되어서 사는 겁니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이 비행기가 보입니까? 비행기에서 내려 저만치 떨어져야 비행기가 보이지요.

부처님은 항상 진리를 떠나지 않고 사는 분이라지요? 진리속에 안겨 한 번도 진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어찌 진리를 말로 해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알지 못하는 이것, 어찌 그 제자인 가섭에게 전할까요?

 

한마디로 진리는 남도 멸함도 없는 불생불멸이나 깨친 성자들이 그 때에 맞게 새롭게 펴심이요, 한시도 진리를 떠남이 없는 본래자리에서 생활을 하라 말입니다.

 

<대종사 법문> 
4)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

    (邊山九曲路 石立聽水聲 無無亦無無 非非亦非非)

 

석두암에 사신 석두거사가 대종사님이시니 돌은 쉽게 대종사님이라 합시다.

변산의 굽이치는 계곡에서 대종사님이 가만히 서서 물소리를 듣자하니 ‘없다 없다, 아니다 아니다’를 계속 말 하더랍니다. 뭐가 없고, 뭐가 그렇게 아닌지…

 

우리는 나면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감이 생기지요. 그러다 보니 저렇게 대통령 한번 하려고 저 난리 아닙니까? 끊임없이 "없다, 없다" 하면서 ‘나’라고 하는 존재감을 초월하라 말입니다.

 

살다보니 뭘 좀 알게 되지요. 그러다보니 겸손함이 없고, 내가 최고라 뭐든지 내 뜻대로 하지요. 계속 "아니요, 아니요" 하면서 세상의 시비를 초월하라 말입니다.

 

유무초월, 시비초월의 생사문 자리지요.

깨달으신 성자들은 물소리에서도 진리를 얻습니다. 깨친 분상에서 보면 모든 것이 천기를 누설하는 것처럼 보이고 들리나 봅니다.

 

 <정산종사 법문>

5) 유위위무위 무상상고전 망아진아현 위공반자성

   (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

 

풀어보면 “불보살은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무위)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무상)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무아)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 의두는 한마디로 ‘무아봉공’하라 말입니다.

밖으로 흔적없는 행을 하고(무위), 안으로는 흔적없는 마음을 가지며(무상), 중생인 나를 잊어(무아), 공을 위하면(봉공) 그가 부처라는 말입니다.

무아봉공이 핵심이지요.

 

 <대산종사 게송>

6) 대지허공심소현(大地虛空心所現) 시방제불수중주(十方諸佛手中珠)

    두두물물개무애(頭頭物物皆無碍) 법계모단자재유(法界毛端自在遊)

 

풀어보면 “천지에 마음이 나타난 바, 모든 부처님이 가지신 여의주라, 일체 이치와 만물에 걸림이 없으니, 법계를 털 끝에 놓고 노니는구나” 입니다.

 

일과 이치에 걸림없이 연마하면 여의보주가 나타난다는 말인데 모난 부분은 깎아서 둥글게 하고, 흐린 부분은 닦아서 맑게 하라는 것이지요. 변의품 36장에 보면, 시해법이나 영통을 하더라도 '인간의 사리'를 잘 알지 못하면 조각도인이라 했습니다.

 

 

 

한 순간도 이 화두를 놓지 말고 적공, 또 적공해야 이 화두가 내포하는 바를 내가 받아가지게 되고,

언제나 진리를 떠나지 않고 부처의 행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대적공실을 우리가 연마한 의미는 이것입니다.